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타구치 렌야 (문단 편집) === [[싱가포르 전투]] === 1940년엔 중장으로 진급했고 [[야마시타 도모유키]] 휘하의 18사단 사단장으로 [[싱가포르 전투]]에 참전했다. 여기서 무타구치는 [[수류탄]] 파편에 맞아 왼쪽 어깨를 다쳤다. 이 부상을 입은 이유가 꽤나 걸작인데, '''부대에서 술 잔치 벌이다 갑자기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으려다가 다친 것'''이라고. 어쨌거나 무타구치는 지휘관으로서 부대를 끝까지 지휘하여 야마시타가 직접 문안 편지와 포도주를 보내주기도 했다. 1941년 12월, 무타구치 렌야는 지트라 전투의 사단장으로 참여하였고 [[영국군]]은 55일만에 무너지게 됐는데, 여기에서 일본군은 처칠레이션이라고 하여 영국군의 보급품을 뺏어먹으며 진격하게 된다. 이로 인해 렌야의 머릿속엔 '영국군은 약하고 보급품은 뺏으면 그만'이라는 생각이 박혔다. 그리고 18사단은 [[싱가포르]] 함락 뒤 [[필리핀]]의 바탄 반도에 갔으며, 1942년 4월에는 [[버마]] 전선으로 다시 왔다. 1943년 3월에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. 이때 대본영의 [[인도 제국|인도]] 진공 계획을 "'''밀림과 산악에서는 작전 수행이 어렵다'''"며 격렬히 반대했고, [[도조 히데키]]는 "냉철한 판단"이라고 극찬했다. 그런데 이때는 버마 함락의 후유증으로 인도 국경 쪽 [[영국군]]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서 오히려 이때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았다. [[일본군의 육해군 대립|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사이가 나빴지만]] 1943년 당시엔 [[일본 해군]]이 1942년 [[미드웨이 해전]]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나마 [[제해권]]은 유지하고 있었다. 물론 일본군의 바다를 통한 육해군의 보급과 수송력의 실상은 [[과달카날 전투]]에서 볼 수 있듯이 시궁창이기는 했지만, 그래도 1944년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. 이랬던 그가 [[버마]]를 지키는 제15군의 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[[인도]]에 주둔한 [[영국군]]이 버마를 공격하자, 생각을 바꿔서자신이 인도 진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. [[조지프 스틸웰]]이 버마 탈환 노래를 부르며 병력을 모아 [[인도 제국군]],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했던 상태에서 말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